- 글 싣는 순서

(상) 명분의 조선과 최명길
(하) 멸망직전의 나라를 구하다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이들이 체면과 명분 때문에 중요한 이득을 놓치고 만다. 작게는 조직과 기업, 가정과 사업장 안에서도 끊임없이 명분과 실리를 놓고 다툼이 존재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외로운 선택일지라도 그것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 도움이 된다면 명분론에 매달리거나 체면에 갈등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누가 이득을 보느냐를 살피면 될 뿐이다. 눈앞의 이익에 매달리기보다 더 큰 미래를 위한 선택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꾸준한 자기 계발의 훈련과 끝없는 실패 속에 얻어낼 수 있는 값진 교훈이다. 지금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가? 처음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선택해 보라.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실리다. 그래도 선택에 후회가 없다면 그를 따라가면 될 일이다.
 

명분으로 망해 간 조선

“조정을 바라보니 무신들이 많기도 하구나
어렵고 치욕스러운 화친은 누구를 위해 한 것인가
슬프도다 충신들은 이미 죽었으니 임금님을 모셔 호위할 사람이 없구나!“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풍비박산이 났을 때 비가십수(悲歌十首)라는 노래가 널리 퍼져 있었다. 위 노래도 그 중의 하나였다. 어렵사리 화친을 시도하여 종묘와 백성을 구한 사람은 매국노가 되었고 전쟁을 주장한 이들은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조선 내 대부분의 지도층은 반청숭명의 명분론으로 주전론을 주창했다. 그 속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고 악역을 자처하며 사직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지도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조판서 최명길이었다.

그는 가문과 자신에게 비난과 모욕적인 포화가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미루지 않았다. 뚝심과 배짱으로 나홀로 실리주의를 선택한 최명길은 모든 사람이 ‘노’ 할 때 ‘예스’를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영웅이었다. 자존심을 버린 대가가 너무도 컸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 것을 버리고 큰 가치를 좇다

최명길은 가만히 자리만 지켰어도 많은 것을 거머쥘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기득권자였다는 말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보위에 세운 반정 공신이라 공신으로서의 재산과 명예, 자리보전도 가능한 위치였다. 하지만 최명길은 거의 모든 관료들이 명분만 중시하여 전쟁을 주장하는 바람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1636년 12월 남한산성으로 급히 쫓겨간 인조는 주화와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채 세월만 축내고 있었다. 성을 지키는 자는 겨우 1만, 성 안에는 한 달 분 식량만 남아 있는데 주전론을 주장하는 사대부들은 차라리 싸우다 죽자며 전쟁을 소리높이고 있었으니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려 있는 처지였다. 성밖에는 20만에 달하는 청군이 조선의 헝복을 요구하며 응하지 않으면 모두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최명길은 이 때 용기를 내어 주화론을 펼쳤다. 싸우는 것보다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은 얻고 종묘와 백성은 지켜나가자는 주장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을 때 불안감과 고독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나 최명길은 달랐다. 그는 단호하게 자신의 명분론을 폐기하자고 주장했다.

“절개? 그것은 일개 선비에게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나라에는 통할 수 없는 말이다. 나라가 절개를 지킨다고 결사항전하다가 무너지면 이 나라는 청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다”

한국철강협회 2017년 철강사진전 <우주로의 꿈> 황기모 作

그러나 대부분의 지도층이 주전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는 선비들로부터 유독 사랑과 존경을 받아 온 김상헌도 있었다. 그는 조정에 들어와 주화파 최명길이 청나라 군에 들고 갈 항복 답서를 보고 달려들어 이를 빼앗으며 외쳤다.

“우리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죽으면 그 뿐일 것이오. 조선의 남아들이 어찌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단 말이오?”

달려 들어간 김상헌은 임금이 보는 앞에서 항복 문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며 이항복을 만류하고 몸부림을 쳤다. 임금도 신하들도 묵묵부답이었다. 누가 항복을 좋아해서 한단 말인가.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최명길이 의연히 나섰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찢는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사람도 있는 법이오”

최명길은 엎드려 찢어진 항목문서를 주워 다시 붙여 들고 청태종에게 달려나갔다.

최명길은 오성 이항복의 제자다. 이항복의 실리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그는 평소에도 사물의 본질과 실리를 찾아 이를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병자호란의 실리론도 이같은 그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명길의 시간 벌기와 목숨을 건 주화론 끝에 항복조건이 협상되었다.

청나라 병사들이 삼전도에 수항단(受降檀)을 높이 쌓아 인조가 그 자리에서 청 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리게 했다.

이어서 두 왕자의 인질에다 수많은 장수와 신하들의 감금과 유배, 그리고 숱한 백성들을 볼모로 데려가게 되었다. 역사는 이를 두고 삼전도의 치욕이라 불렀다. 하지만 군주와 사대부들은 치욕스러웠으나 전쟁이 끝난 나라와 백성은 살아남았다.

화친 후에도 사대부들은 주화론자들을 매국노라고 욕하고 청나라 사신을 면전에서 홀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전쟁 운운 하며 북벌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최명길은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내 힘을 모르고 경박하게 큰 소리만 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만약 다시 청나라의 노여움을 유도하면 이번엔 지난 번 전쟁을 훨씬 넘는 비극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더 큰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국력이 바닥이고 청나라는 강합니다. 화친하는 동안 민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으며, 군량저축과 방어시설을 갖춰 적의 허점을 노려야 합니다”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택하자는 그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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