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분 한주 없는데 정권마다 경영진 교체…차라리 외국인 회장을

 

김인영 기자는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신문학과(80학번) 입학, 서울경제신문 기자로 출발했다. 경제 금융 국제부장을 지내면서 포스코 출입기자로도 활동했다. 서울경제 편집국장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오피니언뉴스 대표이사 겸 발행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오피니언뉴스 김인영기자] 24년 전인 1994년 1월 7일 저녁 무렵의 일이다. 청와대에서 포항제철의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의 경영갈등에 대해 불호령이 떨어졌다.

모 조간신문의 내일자(8일자) 초판을 읽던 김영삼 대통령이 포철 경영갈등에 관한 기사를 보고 진노했다는 것이다.

그 조간신문 경제면에는 「포철 파워게임...무성한 추리」라는 제하에 박태준씨의 「배신발언」이후 회장과 사장이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김철수 당시 상공자원부 장관은 청와대로부터 긴급전화 연락을 받았다.

전화선을 통해 김 장관에 전달된 내용은 대통령이 포철 회장과 사장의 불협화음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보고 무척 화를 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 장관은 정 회장-조 사장의 사표를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 장관은 즉시 정 회장과 조 사장을 서울시내 모처로 불러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자택에 돌아와 있던 정 회장과 조 사장은 급히 약속장소로 나갔다. 물론 수행비서를 대동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런 자리에는 대동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김 장관은 청와대의 분위기를 전달하고 두 사람에게 사표를 쓰라고 했다. 밤늦게 어색한 장소에서 만난 정 회장과 조 사장은 고위층의 의향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표를 냈다.

그해 포철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명식 회장과 조말수 사장은 1년만에 물러나고, 관료출신인 김만제씨가 포철의 새 회장에 올랐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포스코로 이름을 바꾼 세계 굴지 철강회사의 경영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 권오준 회장이 지난 1일 포스텍 체육관에서 열린 창립기념일 행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포스코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18일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에서 이사회를 마치고 기자들에게 “저보다 더 열정적이고 능력 있고 젊고 박력 있는 분에게 회사 경영을 넘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그 부분을 이사회가 흔쾌히 승낙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의 임기는 2020년 3월까지로, 큰 문제가 없는한 2년을 더 회장 자리에 있어도 된다.

그런데 무언가 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언론들은 그 문제가 바로 정부의 사임 요구라고 해석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경영인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기필코 제철소를 가져야 한다”며 박태준에게 제철소 건립을 지시한다. 박태준은 각하의 명을 받아 포항 바닷가 허허벌판에 제철소를 짓기 위해 39명의 인원으로 초라하게 포항제철을 출범시켰다.

그로부터 50년동안 포항제철, 나중에 포스코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영진이 바뀌는 불운의 역사를 이어 나갔다.

포스코 50년 역사에 절반인 25년간 경영을 한 창업자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당시 「한국에서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세계은행의 판단과 이에 근거한 선진 철강국들의 기술 및 차관제공 거부, 대일청구권자금 전용에 대한 정계 및 언론계의 끊임없는 반대를 거치면서도 1973년에 제철소 1기 공장을 준공하게 된 것은 경제발전을 제1의 목표를 둔 박정희 정권이 박태준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 포항제철 현판식 /사진=포스코

박태준은 젊은 시절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에서 기계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보니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당시 이공계통을 공부한 사람들은 취직할래도 취직할 수가 없었다. 공장하나 변변한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박태준은 육사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소대장을 지낼때 6.25 전쟁이 터졌다. 6.25 기간 3년을 참전한 후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은 박정희 장군의 비서실장으로 군사정권에 참여했다.

박정희는 국가경제의 핵심산업인 제철소 건설을 측근 박태준에게 맡겼고, 그는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정치적 보호막으로 삼아 철강 불모지에서 제철소를 건설했다.

포철 50년 전반기 박태준 신화의 창조는 정치권 외풍에서의 보호가 절대적이었다. 박태준 스스로가 거물이었기 때문에 정치권과 관계를 통해 외풍을 막을수 있었다. 박태준이 받은 전권 위임장은 조선시대로 치면 암행어사의 팔마패에 해당했고 일본 토쿠가와(德川) 시대의 발문(發紋)에 비유됐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박태준은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박태준은 군인 출신이어서 전두환 등 신군부와 쉽게 인연을 맺을수 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5공화국 때 전국구 의원직을 맡아 정치권과의 연계를 맺는다. 또 전두환 대통령의 처남 이창석씨에게 협력회사를 떼주었으며 전두환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권부와 타협을 모색했다.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의 6공화국 정부가 들어섰을 때도 박태준은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맡았다. 노태우 시절에 박태준은 포철 회장직을 유지한채 집권당인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정치적 보호막으로 삼아 포철을 이끌어온 박태준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의반타의반 격으로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외풍을 막는다는 이유로 정치에 뛰어든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족쇄로 채워졌다.

1992년 박태준은 대권도전에 나서 김영삼 후보와 민자당 경선 대결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박태준은 경선을 포기하면서 그해 10월 10일 포철 회장 자리를 측근이 황경로 부회장에게 넘겨준다.

이듬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후 정치보복을 당하게 된다. 박태준만이 아니라 포철이라는 회사와 임원 모두가 대상이었다. 이어 정명식 회장, 조말수 사장 체제가 들어선다. 부산 출신의 조말수 사장은 박태준 사단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정명식-조말수의 양두체제는 불화에 휩싸인다. 부산 출신 정권 실세와 두터운 인맥을 형성한 조 사장과 경영에서 밀려 나있던 정명식 회장 사이의 갈등은 두사람 모두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김영삼 정부는 회장과 사장을 동시에 경질하고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한 김만제씨를 새 회장으로 낙점했다.
 

▲ 그래픽=포스코

김만제씨를 이어 유상부, 이구택씨 등 포스코 출신들이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후임 포스코 회장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뀌었고, 말로가 좋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 유상부 전 회장과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이구택 전 회장은 각종 비리 사건과 연루되면서 옷을 벗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정준양 회장은 취임 초기부터 정권실세와의 연루설에 시달렸으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후 사퇴했다. 이제 박근혜 정부때 포스코 경영을 맡은 권오준 전 회장이 임기 2년을 남겨둔채 돌연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유능한 후배들에게 넘긴다면서….

포스코에는 정부 지분이 한주도 없다. 1대 주주는 국민연금으로, 11.08%의 지분을 갖고 있고, 외국인들이 57%를 보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소액주주운동을 하던 장하성, 김상조씨등이 경제정책을 쥐고 있다. 그들의 평소 주장에 따르면 포스코 경영에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된다.

그 견해에 따라 엘리어트와 같은 기업지배구조 개선 펀드들이 중심이 되어 소액주주를 모은다면 제9대 포스코 회장은 외국인에게 넘어갈수도 있다. 차라리 외국인이 경영을 맡는다면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포스코를 방어할수 있지 않을까. 일본 닛산 자동차의 카를로스 곤 회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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