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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리니언시의 추억
글 장대현 전문위원/정리 스틸프라이스 | 승인 2018.09.18
장대현 스틸프라이스 전문위원

몇 년 전 퇴근길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계열사 임원이었다. 그날 아침 공정위 조사관들이 계열사에 들이닥친 터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 임원은 다급한 목소리로 “담합에 대해 자진신고를 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회사가 보기에 담합이라 판단되면 자진신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계열사는 자진신고서 양식에 간단한 내용만 적어 공정위에 팩스를 보냈다. 그 팩스 한 장으로 계열사는 과징금 전부와 검찰 고발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당시 계열사는 현금 유동성이 부족하여 재무상태가 좋지 않았다. 만약 리니언시가 없었다면 과징금 때문에 파산의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팩스 한 장이 회사의 운명을 바꾸었다.

최근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철근 담합에 대한 의결이 나왔다. 철근 담합사건은 2016년 말부터 조사가 시작되어 거의 2년 만에 공정위 판단이 나온 것이다. 애초 우려와는 달리 과징금 규모가 크지 않아 다행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총 과징금 규모는 무려 1,200억 원이나 된다. 2000년 8개 제강사에 최초로 부과된 과징금 규모는 약 40억 원에 불과했다. 18년 사이에 과징금이 30배 늘어났다. 과징금을 부과받은 업체들이 이번 결정에 불복하면 지루한 법정 싸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에는 한 업체의 리니언시가 있었다. 업계에서는 리니언시 업체를 밝혀 시장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철근 담합이 공정위에 적발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담합이 20년 동안 간헐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담합에 가담한 업체들도 거의 같고, 심지어 담합사건을 대리하는 로펌들도 비슷하다. 왜 이렇게 흑역사(黑歷史)가 반복되는 것일까. 결국 담합으로 인한 피해보다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아직은 담합으로 부과된 과징금을 감당할 만한 것이다. 회사는 담합이 위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황에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담합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리니언시(leniency)의 사전적인 뜻은 ‘관대, 관용, 너그러움, 자비로움’이다. 말 그대로 ‘잘못한 기업에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가 있다. 공정위는 ‘자진신고 감면제도’라고 번역한다. 리니언시는 미국에서 1978년 처음으로 시작된 제도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2005년 법 개정으로 제1순위 자진 신고자에게 과징금을 100% 면제하고 형사고발도 제외하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그 이후 자진신고가 많이 늘어났다. 지금은 담합을 발견하는데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리니언시의 이론적 배경은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다. 죄수의 딜레마는 범죄 혐의를 받는 두 사람이 각각 상황에 따른 최선의 전략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실제 진범(眞犯)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스스로가 진범이라고 자백해 버리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런 왜곡 현상은 리니언시 운영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리니언시는 담합을 적발하는데 유용한 제도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공정위도 리니언시에 의해 수집된 증거가 실체적 진실과 부합하는지를 항상 고려하여 제도 운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기업들의 공정거래 리스크는 갈수록 커지고, 세계 각국의 법 집행 또한 더욱 엄격해 지고 있다. 공정거래 리스크를 감소하기 위한 기업의 대응방안은 아주 어렵지 않다.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된다.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담합의 오해를 살만한 경쟁사 임직원들과의 접촉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말자. 경쟁사 임직원은 접촉하지 않는 것이 회사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경쟁사 가격과 같은 비밀정보가 우리 회사 수중에 있다면 공정위 칼날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이제 과거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경쟁사의 배신에 눈물짓지 말아야 한다. 오늘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신 경쟁사 직원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글 장대현 전문위원/정리 스틸프라이스  steelprice@steelpric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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